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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조직 개편(노무현재단 펌 글)

by 서랑 (瑞郞) 2011. 8. 22.

 

- <진보와 권력①> 참여정부 지도제작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4화


 

이명박 정부식 조직개편은 인수위 때 ‘부적절’ 결론
- 하드웨어 중심의 부처 통폐합 지양…다각적인 검토 후 ‘개편’ 대신 ‘개념’ 탑재

 


새 정부의 초기 내각과 대통령비서실(청와대) 진용을 짜는 것은 대통령직 인수활동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새 정부의 진용을 짜는 작업은 정부와 청와대 조직에 대한 진단과 개편방안을 확정하고 법률 개정이 이루어진 후,

구체적인 인선에 들어가는 절차를 밟는다.

국민의 정부와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 취임 전 정부조직 개편을 완료하고 내각을 임명했다.

참여정부 인수위는 각 분과위에서 정부 부처별로 조직과 인력에 대한 평가를 진행했으나

조직개편은 단행하지 않았고 출범 후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무개념’ 구조조정과 하드웨어 중심 통폐합 안 한다

공무원사회에서는 대통령선거 기간 동안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공무원 30%를 잘라낼 것’이라는 해괴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정작 당선인의 생각은 이와 달랐고,

또 확고했다.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말이다.

“대통령은 선거 때부터 우리한테 당부한 것이 있었어요. 기본적으로 감량경영 안 한다,

말하자면 구조조정 해가지고 잘라내는 것 안 한다는 겁니다.

우리 재정구조나 인력구조를 보면 사회정책 쪽이 워낙 적습니다.

소셜 서비스(Social Service) 쪽은 공무원이 한참 더 늘어나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쪽에 있던 공무원을 저쪽으로 옮기면 되지, 굳이 공무원 숫자를 줄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김병준)

당선인에게는 이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철학이 있었다. 바로, 하드웨어 중심의 부처 통폐합 역시 지양한다는 것.

“그 다음에 하드웨어 중심으로 안 한다.

정권만 바뀌면 하드웨어를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고 부처 통폐합한다고 정신없이 그러는데,

제가 한 번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다른 나라 보면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부처를 자주 이동하고 바꾸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내무부하고 총무처하고 통합하고 난 다음에 화학적으로 융화되는데 10년 이상 걸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개혁과제가 너무 많기 때문에 하드웨어를 손댈 시간이 없습니다.

’ 그때 대통령께서 ‘완벽하게 동의한다’고 그러시더라고요.”(김병준)

노무현 당선인의 이러한 철학은 이명박 정부의 부처 조직개편과 비교된다.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단계에서 정부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정보통신부를 해체하고 과학기술부와 교육인적자원부를 통합한 것이다.

이러한 조직개편안은 참여정부 인수위 단계에서 이미 검토했고 부정적인 결론이 내려졌던 사안이다.

“정보통신부, 산업자원부, 과학기술부 통합이 하나의 안이고,

과학기술부하고 교육부 합치는 것도 또 검토하고, 다 검토했어요. 먼저, 산자부와 정통부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당분간 IT로 먹고 살아야 되는데 산자부와 정통부를 합쳐버리면 산자부가 정통부를 흡수하는 꼴이 됩니다.

청와대가 아무리 관심을 가진다 하더라도 내부 조직논리상 언젠가는 산자부가 정통부를 흡수해버립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있지만, 당분간은 정통부를 따로 두자,

세계를 향해서 세일즈 하고 우리 기술을 세계 표준으로 등극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을

장관으로 앉혀서 계속 두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죠.”(김병준)



‘부적절’ 결론 내린 정통부 해체, 과기부·교육부 통합

같은 맥락에서 과기부와 교육부도 통합하지 않았다.

과기부와 교육부를 합치면 교육부가 과학기술부를 흡수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그렇게 되면 과학기술정책이 뒤쳐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해찬 전 총리도 교육부장관 경험을 실례로, 교육부와 과기부 통합이 적절치 않다고 지적한다.

“본부에 열 몇 군데, 지방 16개 시․도에 차관급 자리가 있어요. 부교육감이 차관입니다.

그 다음에 지방대 병원 사무국장, 지방에 관리국장, 30개 국립대학교에 사무국장,

이렇게 해서 국장급 자리가 한 100개 가까이 돼요.

그 사람들을 어떻게 제가 다 알겠어요? 본부에 있는 사람도 다 만나기가 어려운데.

그리고 EBS 있죠, 교육개발원 있죠, 평가원 있죠, 징계위원회 있죠.

이런 것들이 전부 다 국장급 내지 1급 자리거든요. 과장급은 400명인가 돼요.

교육부가 그렇게 큰 부서입니다. 거기다가 과기부까지 합쳐놔 봐요. (장관이) 뭘 알겠어요?”(이해찬)

새로운 권력이 자신의 국정철학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정부 조직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정부 조직개편을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하나의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정부와 청와대의 조직 진단과 함께 새 정부 진용을 구축하는 인선작업도 진행됐다.

노무현 당선인은 2003년 1월 2일 1차 인수위 간사단회의에서

국민참여센터에 공식 접수창구를 개설해 인사자료를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추천(추천위원), 검증(정부의 검증시스템 활용),

조정(대통령-총리 상의)의 3단계를 거치도록 해 청탁을 사전 배제했다.

인사과정은 5단계 인사시스템에 의해 진행됐다. 1단계는 인사기초자료 분류 단계로 국민참여센터가 담당한다.

2단계는 분과별 인사추천위원회 심사 및 토론, 3단계는 인수위 인사추천위원회 심사다.

4단계 검증위원회 종합 정밀검증을 거쳐 5단계인 당선인과 총리의 협의를 통해 최종 인선을 결정하는 시스템이다.



취약한 인재풀, ‘비밀팀’에서 검증하고 업데이트

국민참여센터를 통해 총 5,415건의 인사 제안을 접수했으나

정작 당시 관계자들은 취약한 인재풀과 인사자료에 따른 고충을 토로했다. 임채정 전 인수위원장의 말이다.

“행정가는 이제 좀 생겼지요, 그런데 ‘변혁적 행정가’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하면 옛날에 재야활동을 했거나 재야적 시각을 가진 교수들이거나 이런 사람들이

공무원 일을 해본 적이 없잖아, 공무원을 한 사람이 좀 있어줘야 하는데요.”(임채정)

당선인 비서실장과 후에 인사특보를 맡았던 신계륜 전 의원도 그 같은 어려움을 언급했다.

“당선되고 나서 제일 먼저 막막해요. 참모들 주변은 아는데, 대한민국에 우리 참모들만 있겠습니까?

관료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와 같은 편에 없었던 사람들의 진용에 대해서 쭉 보는데, 자료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게 답답한 문제였어요. 결국 비밀리에 팀을 하나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팀에서 인사를 전부 검증하고 업데이트했습니다. 그 팀이 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신계륜)

한편 당선인은 2003년 1월 13일 속개된 2차 간사단회의에서 인사철학과 원칙을 밝혔다. 다음은 인수위 백서 기록이다.

“국무총리 인선 기조와 관련 ‘안정과 균형의 원칙에 변함이 없다’며 당초 입장을 재확인했다.

특히 새 정부 초대 총리는 ‘안정과 균형’ ‘개혁성과 청렴성’ 등 국민적 요구를 고려한 인물이 등용될 것이며

4가지 여건을 다 갖추기 어려울 경우 ‘도덕성과 청렴성’에 비중을 둘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당선인은 또 공기업 및 산하단체 인사 기준으로 효율성, 공익성, 개혁성 등 3대 원칙을 제시하는 한편

완전 공개경쟁채용, 제한적 공개경쟁채용, 개혁성에 의한 발탁인사 등

3가지 인사방법을 토론 의제로 제안했다” (인수위 백서, p290)

사실 국무총리는 일찌감치 내정됐다. 당선인의 개혁성을 보완할 수 있는 안정감 있는 인물로

여기저기서 추천됐고 당선인도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당선인이 고건 총리를 염두에 두기 전에 자료를 드렸는데 거기에도 고건씨가 1위로 나왔어요.

일정하게 김대중 정부 때부터 협력을 했다는 것이 평가를 받았고

또 대통령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는 평가를 내린 것 같아요.

제가 가서 ‘맡아주십시오’ 해서 한 번 거절하셨는데, 두 번 가서 ‘맡아주십시오’ 해서 맡게 됐고,

모처에서 대통령과 셋이 만나 아주 일찌감치 결정되었지요.”(신계륜)



당선인과 고건 총리 내정자 갈등, 조선일보 유출 파문도

그런데 당선인과 고건 총리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다.

새 장관을 임명하기 위해서는 총리의 장관 임명제청이 필요한데

강금실 법무부장관과 김두관 행자부장관 내정자에 대한 임명제청을 거부하고 나온 것이다.

결국 정찬용 청와대 인사보좌관 내정자와 신계륜 특보가 고건 총리를 설득했다.

“대통령이 지명한 강금실, 김두관 두 분을 너무 과하시다고 한 거예요.

대통령이 물러날 성격이십니까? 회의 하다가 그만하자고 하면서 총리가 다 하라고 그랬어요.

… 정찬용 수석하고 둘이 전화해서 그날 저녁에 집 근처 맥주집에서 얘기를 했어요.

총리도 추천권자로서 소신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첫 인사를 자기 소신으로 한다고 하는데, 약간 문제가 있더라도 받아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술 몇 잔 먹다가 합의가 그렇게 됐어요. ‘대통령 만나서 문제제기를 하십시오.

그래도 대통령이 처음 주장을 접지 않으시면 총리님이 지십시오’라고 했습니다.”(신계륜)

한편 청와대와 관련해서는 먼저 2003년 1월 8일 문희상 비서실장과 유인태 정무수석 내정이 발표됐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명단이 조선일보에 특종 보도됨으로써 인수위는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인수위에 네티즌들의 항의가 봇물을 이뤘다. 당일 오후 6시 국민참여센터로 300여통 이상의 항의전화가 접수됐다.

‘언론개혁 대상인 조선일보가 특종보도를 한 것은 내부의 정보 누설자가 있다는 것’,

‘벌써 언론개혁을 포기하고 언론과 거래를 하려는 것 아니냐’ 등의 내용이 주를 이뤘다.

당선인도 진노했고 보도배경에 대한 인수위 차원의 조사가 벌어지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 같은 진통을 거치며 인선이 계속됐다.

1월 22일 고건 총리 내정이 발표됐고 마지막까지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끈

최초의 청와대 정책실장은 1월 24일 이정우 교수(인수위 경제I분과 간사)로 결정됐다.

2월 27일에는 참여정부 초대 내각의 면면이 공개됐다.

경제부총리에 김진표 인수위 부위원장이 내정됐으며

김두관 행자부장관, 강금실 법무부장관은 참여정부 초대 내각의 개혁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각됐다.

인수위에서도 윤영관(외교통일안보분과 간사/외교통상부장관), 권기홍(사회문화여성분과 간사/노동부장관),

허성관(경제1분과위원/해양수산부장관) 교수 등이 입각했다.

향후 5년의 첫 발을 뗄 ‘참여정부 사람들’이 그렇게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