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의 기득계층과 수구세력은 제2의 노무현 등장을 두려워 하고 있다.
심심하면 색깔논쟁 이고, 과거사를 들먹인다.
힘 없고 돈 없고 가방끈이 짧은 사람은 대통령 하지 말라고 야단법석 들이다.
병역의 의무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기회주의 인간들이 어찌 애국을 입에 담으며,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과연! 그 들이 민족과 과거사 앞에 그리고, 민초들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묻고 싶다!!!
1987년 8월 거제 대우조선 파업현장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노동자 이석규씨의 사체부검과 임금협상을 도와주다 노동법의 대표적 악소조항인 `3자개입' 금지 혐의로 구속된 노무현 변호사. 33이라는 숫자가 선명한 수의와 반성문을 거부한 눈빛이 인상적이네요.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사진입니다.
1973년 1월 노무현은 유난히 대나무가 많았던 이웃집 처녀 권양숙여사와 결혼했습니다. 사법시험 공부를 하던 중이었죠. 동네 사람들은 권여사를 늘 땅만 보고다닌 수줍음 잘 타던 여자로 기억하네요. 혼례식 장소는 노무현 집 마당. 사모관대^쪽두리^병풍^생닭 위로 길게 늘어진 축문까지. 요즘엔 보기 힘든 전통혼례 장면들이죠. 돈없는 청년 노무현은 신혼여행도 생략하고, 권여사 손에 반지도 못끼워 주고 무현의 집 한방에서 새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권여사의 몸 속에는 장남 건호씨가 자라고 있었다고 하네요.
70년대 후반 노무현이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던 시절입니다. 부산에서 다섯손가락에 꼽히던 시절입니다. 군부독재의 대표적 학생운동 탄압이었던 `부림사건'을 겪고 인권변호사로 탈바꿈하기 전 한때 잘 나가던 때죠.
노무현은 어린시절 사진이 거의 없습니다. 후보시절 공개한 소풍갔던 장면이 거의 유일한 유년기 사진이죠. 이 사진은 부산상고 졸업후 곧바로 시골에 와서 사법시험 공부를 할 때 찍은 청년 노무현입니다. 탱탱한 피부가 지금과는 다르죠. 산밑에 공부방을 짓고 청운을 꿈꾸던 시절이지만, 책값이 없어 울산의 막노동판에도 뛰어들던 우울한 시절입니다.
명절때 집뒤 봉화산 자락에 있는 선대 묘소를 찾아 아들 건호씨의 총을 갖고 겨눠보고 있는 사진입니다. 건호씨는 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로 {부나 권력을 중시하지도 경멸하지도 말고, 자기답게 사는 것이 아름답다}는 가르침을 맘속에 새기고 더군요.
1965년 여름 부산상고 3학년 때 `8인방'이라고 불린 단짝 친구들과 해운대 백사장에 엎드렸네요. 돈이 없어 대학 진학보다 취업반을 선택했고, 불안한 미래에 대해 방황과 갈등이 많았다고 기억하는 시절입니다. 담배를 처음 입에 물어본 것도 고1때 학교옆 코스모스밭이었다고 하네요.
노무현이 노란색 유니폼을 입고 있네요.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할 때 부산상고 교정에서 열린 동문 축구대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지금은 이사갔지만 부산상고가 서면에 있을 때입니다.
누구나 한두장씩 갖고 있는 뺑이 치던 시절입니다. 노무현은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중 1968년 3월 입대했습니다. 23세였죠. 군번 51053545. 원주의 1군사령부 행정병을 거쳐 일등병때 원통에 있는 을지부대(12사단) GP로 배치됐습니다. 수은주가 영하 30도 밑으로 떨어지고, 무장간첩이 침투하던 시절 험한 금봉산 철책을 막던 부대였습니다. 노무현은 날 밤새우는 정보상황병으로 근무했죠. 당시 대대장은 {글 못읽는 까막눈도 많았던 시절이었고, 노무현은 말이 적지만 동료들과 잘 어울렸던 기억입니다. 책을 많이 읽었고 자기 직무는 책임을 다하던 모범 생활을 했다}고 말하네요.
1987년 6월 노무현 변호사는 부산 거리에서 살았습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던 때죠. 오른쪽 마이크를 잡고 서 있는 사람이 노변입니다. 노변은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합니다. 권여사는 먼훗날 {최루탄 터지는 곳마다 아들 딸 손을 잡고 얼굴한번 보려고 찾아다녔다. 결과적으로 온 가족이 투사가 돼 버린 것}이라며 웃은 적이 있습니다.
1992년 5월 부산 칠성시장 앞에서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는 노변호사입니다. 국회의원 재선에 실패하고, 다시 고향에서 활동하던 때입니다. 경찰서장이 그 독종에 혀를 내두른 노무현입니다. 최루탄이 터져도 도망가지 않고 전경들과 혼자 대적해 길바닥에서 버텼기 때문이죠. 아래 사진은 최루탄 파면이 튀어 피를 흘리는 장면입니다.
노무현은 후보시절 아침 5시에 눈을 떴다. 먼저 거실에서 명상과 요가를 했다. 머리가 맑아진다는 요가 예찬론자이다. 권여사는 {맨손체조와 스트레칭을 엮어 남편이 직접 개발안 이상한 동작들도 있다}고 전한다.
후보시절인 2002년 여름 형 건평씨의 회갑연에 모인 양가 가족들. 코엑스 어디였다죠. 뒤쪽 맨 왼쪽이 아들 건호씨, 그 옆이 딸 정연씨입니다. 노대통령은 후보시절 {큰 형이 일찍 죽은 후 작은형은 나의 버팀목이자, 가장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노대통령이 후보시절 노사모 행사때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사진이네요. 이 눈물이 송치복씨가 만든 대선후보 광고 눈물편의 컨셉이 된 것이죠. >
△ 아세안+3정상회의 및 유럽3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던
_____________노 무현 사진모음____________
다시보는 노무현 대통령이 걸어온 길
노변은 주말이면 광안리 앞바다에서 요트를 배웠다고 해요. 동아대 동아리들과 어울려 요트를 당겨보고, 밤늦게까지 백사장에서 막걸리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고 기억하네요.
친구들은 노무현을 의리로 기억합니다. 어렵게 집에서 올라온 향토장학금을 사진 속에 있는 한 어려웠던 친구의 동생 입학금으로 주고 교실바닥에서 자면서 살기도 했습니다. 뒤 쪽으로 40년전의 해운대 전경을 본 것으로도 본전은 뽑는 사진이죠.
친구들이 전하는 노무현의 축구실력은 {기술보다는... 체력이 좋죠} {지치지않고 끈질기게 공을 따라다닌 쪽}이랍니다. 학교 뒤편에서 방과후 작은 고무공을 갖고 놀던 때죠. 노무현은 좋아하는 축구선수로 홍명보, 윤정환,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를 꼽았습니다.
노무현은 39개월만에 만기 제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계급은 상병제대였죠. 월남전에 다녀온 동료들이 무더기로 병장을 달아 병장 진급 여분이 없었다네요. 원통 부대는 노무현이 대통령 당선후 옛 부대를 찾아 내무반과 김장묻던 장소를 기억해 화제가 됐던 곳입니다.
노무현의 애틋한 투쟁이 먼훗날 대선후보 경선때 광주에서 사랑을 받은 한 배경도 되겠죠.
노무현은 어려서 지게질도 하고 산도 잘탔던 강골 체질이다. 중학교때 복싱부에 들어갔는데 {힘도 세고 몸도 빠르다}며 선생이 집에 와서 {복싱시키자}고 한 적도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큰 형이 {쌈질밖에 더 하느냐}며 반대했다고 해요.
윗사진 뒤쪽 부엌에 보이는 사람이 권여사입니다. 권여사는 {과식을 않고 음식은 가리지 않는다. 잡곡밥에 된장·미역·북어·사골곰국, 채소로 만든 담백한 나물류와 국물김치를 좋아한다』고 전한다. 정계입문(43세) 후엔 아침에 꼭 밥을 챙겨먹고, 보약도 먹는다. 음료는 녹차를 자주 마신다. 입맛이 없을 때는 삼계탕을 찾는다}고 전하더군요.
노무현의 골프는 해양수산부장관(52세)때 늦게 배웠다. 칠 때가 돼서 쳤고, 핸디 30에 딱 한번 80대에 들어가봤다고 말한다. 노무현의 머리(필드 입문)」를 얹어준 친구 강태룡씨(자동차부품업)가 전한 골프 폼은 자치기 형. 드라이브(180~200야드)가 장타는 아니고, 공을 잘 맞추는 「또박또박」 타법이다. 실수가 적고 게임에 열중한다.
물(워터 해저드)을 넘기기 꺼림찍하면 무리하지않고 돌아가는 스타일』로 그린다. 파워(힘)보다는 세심하고 치밀하게 치는 셈이다.
노무현의 주량은 폭탄주 1~2잔에 소주 반병이다. 18번은 운동권 가요 `타는 목마름으로'와 선거유세때 따라부르다 익혔다는 대중가요 작은연인들(권태수 김세화) , 그리고 `부산갈매기'이다.
이 눈물을 흘리던 초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정정당당한 개혁의 선봉장으로 끝까지 달리길 기대합니다..
▲ 국방일보에 특별기고한 노무현 대통령의 '추억의 내무반' 기념 글.
노무현 2002년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 출마를 선언하며...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지 못했다.
그게 비록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했던 말을 한 사람들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을 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정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해야 했다.
눈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유지하면서 밥이나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의 600년의 역사
어머니가 제가 남겨주었던 저의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바람 부는 데로 물결 치는 데로 굽히면서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도 역시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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