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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한국인의 안전을 위해 내가 할 도리를 다할 것입니다

by 서랑 (瑞郞) 2013. 4. 10.

 

  (32) “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한국인의 안전을 위해 내가 할 도리를 다할 것입니다”  원글보기☞사람사는 세상[펌]◀

        [이백만교장의 노무현이야기] 한반도에서 전쟁은 절대 불가

                                                                                                                                                                             운영자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소름끼치는 시나리오다. 북핵문제로 북미 갈등관계가 고조될 때마다 불거져 나오는 게 ‘미국의 선제공격설’이다.

  한국 보수진영의 ‘전쟁 불사론’과 미국의 ‘북한 길들이기’는 항상 맥을 같이 한다. “미국이 북한을 친다면, 북한은 당하고만 있을까?” 여기서 숨이 막힌다.

  결론은 간단하다. 한반도에 전쟁이 터진다면, 최대 피해자는 한국이다! 최대 수혜자는?

  세계시장에서 한국기업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 일본, 유럽, 중국 등의 대기업들이다. 미국의 군수산업체는 말할 것도 없다.

  한반도가 다시 국제정치의 제물이 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는 한국을 항상 긴장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공든 탑’이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전쟁이 왜 일어나야 하는가! 한국의 근현대사를 생각하면 소름끼치는 악몽이다.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대북정책의 기조를 확실히 잡았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였다.

  전쟁의 열쇠는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이 쥐고 있다. 한국에는 전시 작전통제권도 없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결'이 같지 않았다. 힘든 조율이 예상됐다.

  노무현으로서는 취임 초에 분명한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었다. 일종의 ’기 싸움‘이었다. 어떤 일이든지 첫 단추가 중요한 법이다.

  2002년 12월 말, 그러니깐 대통령 당선자 시절부터 미국의 선제공격설이 파다했다.

  그것은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확신이기도 했지만, ‘노무현 길들이기’ 성격도 배어있었다.

  대통령으로서는 가장 큰 고민이었다. 미국의 북한공격은 한반도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003년 2월25일 청와대에서 취임식사절단으로 방한한 파월 미국 국무장관과 환담을 나누는 노무현 대통령.

 

  200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 날, 미국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축하사절로 방한했다.

  취임식을 마친 후 청와대 집무실에서 개별면담을 했다. 덕담을 나누던 중 파월 장관이 뼈있는 농담을 했다.

  “저희는 노 대통령에 관한 모든 책과 자료를 읽었습니다.”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노 대통령은 미국언론에 보도되는 선제공격설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다.

  또 다시 뼈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미국은 현재 북한을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옵션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 ‘현재’라니…, ‘옵션’은 또 뭔가? 영 개운치 않은 대화였다. 워싱턴발 외신은 계속 선제공격설을 띄웠고, 국내 보수언론은 그것을 확대재생산했다.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었다. 최종결정권자인 부시 대통령과 담판을 지어 해결하는 것이었다.

 

  5월 워싱턴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리게 되어있었다. 전쟁불가론의 명분을 충분히 쌓아놓아야 했다.   
  3월 10일, 부시 대통령과 첫 대화를 했다. 간단한 전화통화였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공식 지지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노 대통령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요구했다.
  3월 20일 아침,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이라크 공격을 몇 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전쟁 지지를 다시 요청했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체니 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때(4월)에는 북핵문제 해결의 자리가 되게 해달라고 말했다.

  체니 부통령은 이라크 전쟁 지원 요청 차 여러 우방을 순회 방문할 계획이었다. 
  부시 대통령과 전화가 끝난 후 조금 지나,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미국대사가 청와대를 찾아왔다. 역시 이라크 전쟁 때문이었다. 
  노 대통령은 레이니에게 그의 재임시절인 1994년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상황을 심문하듯 다그쳐 물었다.

  레이니는 면담결과를 상세하게 워싱턴에 보고할 것이기 때문에 노 대통령으로서는 확실한 입장을 보여줘야 했다.

 

  국민의 안전이 우방과 동맹보다 더 중요

  “당시에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레이니가 답했다.
  “한반도에 큰 규모의 군대를 보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영변을 폭격할 계획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하면서 사태가 동결된 것입니다.”    
  ……노 대통령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는 것은 남한까지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의 동의 없이 공격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들으면 한국인들은 매우 서운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한국인의 안전을 위해 내가 할 도리를 다할 생각입니다.

  한국 국민의 안전은 우방과의 동맹보다 더 중요합니다. 나쁜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1)

 

  5월 14일 오후 백악관 기자회견장. 노무현과 부시, 한미정상은 회담결과를 브리핑했다.

  먼저 마이크를 잡은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뒤이어 마이크를 잡은 부시 대통령은 “나는 노 대통령에게 평화적 해결의 추구를 보장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선제공격설은 일단 이렇게 잠재웠다.

  노 대통령이 ‘평화적 해결’이라는 말을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얻기 위해 이라크 파병 결정 등 사전준비를 했음은 물론이다.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그것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재산이 달려 있는 전쟁이라면 더욱 그렇다. 실제 그런 사태가 벌어졌다. 1994년 미국의 영변폭격작전이 그것이다.

 

  전쟁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6월 16일 클린턴 대통령, 고어 부통령, 크리스토퍼 국무장관, 갈루치 핵대사 등이 참석한 백악관회의에서,

  국방장관 페리와 주한미군사령관 럭은 1만명의 미군 병력을 추가로 한국에 투입할 계획을 설명했다.2)

 

  미국의 전쟁계획은 ‘결정’되어 있었다. ‘고려의 단계’나 ‘준비의 단계’가 아니라, ‘착수의 단계’였다.

  주한미군은 코브라헬기보다 훨씬 강력한 아파치헬기로 교체했고, 브래들리 장갑차도 증강 배치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속속 도착했다.
  한반도에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군사망자는 8만~10만명, 한국군 사망자는 그보다 많은 수십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보고서가 나왔다.

  수도권 지역 거주 미국인들의 소개계획도 통보됐다. 펜타곤 시계의 시침은 ‘그날, 그 시간(D-day, H-hour)’을 향해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었다.

 

  한국은 몰랐던 94년 한반도 전쟁시나리오

  ‘한반도에서의 전쟁 결정이 우리의 손에 있지 않고 남의 손에 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은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한국인 대부분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냥 일상생활에 빠져 있었다.
  한국인들이 곤히 잠든 사이, 백악관 회의실에서는 7천5백만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우리 아가 잘도 잔다’의 동요처럼, 한국인들은 기차소리는 요란한데 철 모르는 아이처럼 잠만 자고 있었다. 이게 더 큰 충격이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긴급중재에 나섰다.

  당시 국민회의 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조언도 있었다. 카터는 평양으로 가는 길에 6월 14일 서울을 들렸다.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카터와 부부동반으로 저녁식사를 하며 북핵문제 등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부부동반 식사’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김 대통령은 그때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다. 카터는 15일 판문점을 통해 입북했다.
  김 대통령은 16일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동분서주했다. 김 대통령의 회고다.

 

  6월 16일 오전 안보수석으로부터 내게 이런 보고가 올라왔다.

  “레이니 주한 대사가 내일 기자회견을 합니다.” 그 내용인즉 ‘회견 직후 주한미군 가족과 민간인 및 대사관 가족을 서울에서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미군 가족이나 대사관 직원들을 철수하는 것은 미국이 전쟁 일보 직전에 취하는 조치였다.

  … 더욱이 레이니 대사도 딸과 손자, 손녀에게 한국을 떠나라고 지시해두었다는 것이었다.3)

 

  김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공보비서관(영어통역관)을 했던 박진 전 의원(한나라당)의 회고는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그는 미국의 북한공격작전이 어떻게 진행됐고, 어떻게 백지화됐는지를 더욱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카터는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평양으로부터 백악관으로 긴급전화를 하여

  김일성 주석이 북한 핵개발을 동결하고 IAEA 사찰단의 북한 체류를 계속 허용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 1994년 6월의 한반도 위기상황이 아무도 예측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해소된 것이다.4)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겠다는 결정도 미국 혼자서 했고,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도 미국 혼자서 했다. 그 결정에 한국은 없었다. 철저히 배제됐다.
  이것은 아니다. 동맹도 아니고 우방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미국에게 한미동맹의 파트너는 없었다. 허울뿐인 한미동맹이었다.

  튼튼하다던 한미공조는 식언이었음이 드러났다.

 

   ▲2003년 10월20일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6자회담 조기 개최를 통한 북핵문제 해결 방침을 재확인했다.

 

  노무현은 달랐다. 한국의 동의 없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려 했고, 결국 만들어 놨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조율하느냐’ 였다.

  진보논리 없이 대화 없고, 보수논리 없이 균형 없다!
  노 대통령이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두 나라를 조율하면서 지킨 원칙이다. 미국의 부시 정권과 북한의 김정일 정권은 불구대천의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

  워싱턴은 평양에 대해 ‘악의 축’ 또는 ‘깡패 국가’로 규정했다. 게다가 강력한 금융규제조치로 북한의 돈줄을 꽉 틀어 막아버렸다.

  그리고 언제든지 선제공격할 채비를 해놓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이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야 했다. 미국과 관계에서는 진보의 논리로 대화를 유도했고, 북한과 관계는 보수의 논리로 균형을 유지했다.

  그리고 북한의 돌출행동에 대해서는 철저히 ‘낮은 목소리, 느린 대응’으로 임했다. 불필요한 자극을 없애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

 

  ‘고통의 터널’ 뚫고 전쟁에서 평화로

  부시 대통령이 선제공격론을 버렸다.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한국의 동의 없이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말했고, 부시는 받아들였다.

  이와 함께 북핵문제를 대화로 해결해 나가기로 의기투합했다.
  북한에 대해서는 “사태를 오판하지 말라”고 인내심을 갖고 설득했다. 한국의 국민들에게는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믿음을 확실히 심어줬다.

  한국의 진보진영에게는 “한반도 전쟁설이니 선제공격론이니 하면서 과거처럼 ‘안보장사’하지 마라. 북한이 붕괴하면 더 큰 혼란이 온다”고 경고했다.

  노 대통령은 2007년 가을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통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소회를 밝혔다. ‘협상 비법’도 털어놨다.

 

  노 대통령은 ‘전쟁이냐, 아니냐’와 같은 국가운명이 걸린, 절체절명의 문제에 대해서는 협상방법도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보통 협상할 때, 내 카드를 보여주지 않는 것, 상대방이 내가 무엇을 할 지를 모르게 하는 것이 하나의 협상전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그것은 서로 이익을 가지고 나눌 때 하는 것이지요. 북핵문제처럼 아주 중요하고 큰 문제,

  말하자면 사태의 향방에 국가의 운명이 걸려 있는 아주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상대방이 내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하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내 포지션이 정확할 때 상대방이 산수로써, 전략적 산수로써 계산하고 그다음에 행동하기 때문에 서로 예측하기가 좋은 것이거든요.” 5)

 

  언제 서울과 워싱턴의 하늘에 북한 인공기가 평화롭게 휘날리고, 평양 한복판에 한국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가 자유롭게 펄럭일까.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1994년 스웨덴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후 했던 말을 되새겨 볼 때다.

  이스라엘 노동당 당수였던 라빈 총리는 1995년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세상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전쟁 묘지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해야 할 국가 지도자들의 실패를 기록한 침묵의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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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참여정부-절반의 비망록 62쪽. 이진 지음, 도서출판 개마고원. 이진은 참여정부 출범 후 2년동안 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을 지냈다.
  2)한반도, 운명에 관한 보고서 132쪽, 하바드대학교 케네디스쿨 편, 서재경 옮김, 김영사. 서재경은 언론인 출신으로

     (주)대우 남미본부장, 대우그룹 부사장 등을 지냈다. 희망제작소 상임고문을 역임했고, 현재는 서울신용보증재단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서재경은 1997년 미국 하버드 케네디스쿨(행정대학원)에서 국제협상론을 연구하던 중 제공된 학습자료를 번역하여 이 책을 냈다.

     대학원장은 미 국방차관을 지낸 조셉 나이 박사(안보전략전문가)였고 하트킨스 교수와 갈루치 핵대사 등이 특강을 했다.  
  3)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상) 315쪽, 김영삼 지음, 조선일보사.
  4)청와대비망록-내가 만난 세계정상들 95쪽, 박진, 중앙M&B. 박진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외무고시에 합격했으나 학자의 길을 걸었다.

     김영삼정부 시절 청와대 공보비서관(통역관)과 정무비서관을 지냈다. 한나라당 소속의 3선의원으로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을 역임했다.
  5)오마이뉴스, 2009년 6월 15일, 노무현이 5년간 미국에 준 ‘확실한 정보’
  ● 저자 주: 이 글은 저의 졸저 ‘노무현의 가치, 노무현의 정책 –불멸의 희망’에 있는 내용을 일부 고친 것입니다.

      ‘불멸의 희망’ 382~397쪽 ‘한국 동의 없이 한반도에서 전쟁할 수 없다’는 항목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