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신뢰’ 회복되야 경제성장도 가능하다
[이정우 칼럼-참여정부 경제를 말한다⑤]
이정우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참여정부는 개혁과 경제성장을 열심히 추구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경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약자, 패배자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경제학에서 성장과 분배는 오래된 문제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의 축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특히 언론계의 풍조는 이 문제를 접근할 때 의례 성장이냐 분배냐 식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너무 편협하고 고루한 사고방식이다.
성장-분배 함께 가야 경제발전 가능…참여정부 성장-분배 함께 추구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수십년간 성장지상주의 경제철학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고, 소위 ‘선성장후분배’(先成長後分配)의 사고방식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 담론이 되면서, 어떤 사람이 분배를 이야기하면 그것은 마치 성장에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헌법도 국가의 역할을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배를 이야기하면 곧 좌파, 사회주의인 것처럼 보는 원색적 사고가 횡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분배는 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거나 먼저 성장부터 해놓고 나중에 분배를 걱정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최근 경제학의 연구결과는 그것과 오히려 반대다.
소득불평등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최근 연구결과를 보면 불평등이 클수록 성장에는 불리하다는 결과가 훨씬 많이 나와 있다.
불평등이 심한 나라일수록 가난한 집 아이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므로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가 부족하여 경제성장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는 IMF, OECD 같은 가장 보수적인 국제기구에서도 분배가 나쁘면 오히려 성장을 저해하므로 분배 개선에 힘써야 한다는 보고서를 연이어 내고 있으니
과거 조류에 비하면 상전벽해 같은 느낌을 준다. 분배가 잘 될수록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명제가 점차 시대의 대세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성장과 분배는 반드시 이분법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없으며, 적절한 수단을 통해 얼마든지 동시 달성이 가능하다.
가령, 참여정부가 추진한 10.29 대책과 같은 부동산대책도 집값 안정을 가져와 빈부격차 해소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도 기여하므로
효율과 형평의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이 가능하다.
[그림설명] GDP 중 복지지출에 대한 비중은 참여정부 첫해 5.4%에서 마지막해 7.7%까지 2.3%p나 크게 증가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첫해 8.4%에서 마지막해 9.2%로 임기 중 0.8%p증가에 그쳐 정체상태를 보였다. (왼쪽) 또 노무현 정부 당시 복지확대 정책으로 수급자를 대폭 확대함으로써 이 제도의 혜택을 받는 수급률이 첫해 2.9%(137만명)에서 3.2%(155만명)까지 늘었으나,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첫해 3.2%(153만명)으로 약간 줄었다가 마지막해 오히려 2.7%(139만명)으로 감소했다. (출처: 민주정부가 유능한 33가지 지표, 미래연 발간)
지속가능경제 위해 노사신뢰 중요…참여정부 2004년 ‘노사정 대타협’ 시도
사회통합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노사관계다. 한국의 대립적, 전투적 노사관계는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노사관계는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고, 그 배경에는 과거 독재 시절 수십 년 동안 축적된 불신과 억압의 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치열한 국제경쟁 시대에 불신의 노사관계와 높은 임금 인상은 지속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려면 불신과 대립의 노사관계 극복이 필수불가결이라는 데 대체로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여정부 초기 2004년 2월에 성립한 ‘일자리창출을 위한 노사정 대타협’은 바로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다만 그 협약은 민주노총이 빠진 미완의 협약에 머물러 실질적 효과는 내지 못하고 선언적 의미에 그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있다.
어쨌든 이것은 유럽식의 노사정 사회협약 모델로 가자는 방향이었다.
1982년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이나 1987년 이후 아일랜드의 사회협약은 그 뒤 경제성장과 고용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노조는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경영자는 일자리를 보장해주고, 정부는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런 사회협약이 지금까지 성공한 나라들을 보면
거의 다 사회적 대화의 전통이 있는 유럽의 소국들인데 우리나라와 같은 규모의 나라에서,
더구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푸는 전통이 없는 나라에서 과연 이 모델이 성립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노력해서 한국에 이런 모델이 성립한다면 그 잠재적 효과는 대단히 클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혹자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런 방식이 시기상조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자기비하로 보인다.
과거 유럽에서도 치열한 전투적 노사관계가 오랫 동안 자리잡고 있었으나 1920-30년대에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에서 노사대타협에 성공하여
일거에 산업평화가 자리 잡으며, 노사분규 건수가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놀라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현재 노사 수준이 이들 나라의 90년전 수준에도 미달한다고 보는 것은 우리 능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독재정부 국민 속여 불신-사회갈등 일상화…경제발전 가로막는 요인
사회통합을 이야기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있으니 소위 집단이기주의의 문제다.
지구상에 사회갈등이 없는 나라는 없지만 한국만큼 사회갈등이 일상화하고, 도처에 집단이기주의가 나타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나라의 상태가 이 지경에 이른 배경은 오래 동안 역대 정부가 국민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눈앞의 편익을 위해 국민을 속이고, 억압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오랜 불신이 누적되어 국민은 정부가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못 믿겠다는 것이고,
따라서 내 몫을 챙기기 위해 끝까지 극한투쟁을 불사하는 사례가 빈발한다. 이런 나라는 도저히 경제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경제학자 올슨(Mancur Olson)은 그의 명저 <세계각국의 흥망성쇠>(1982)에서 이익집단이 어느 정도 할거하느냐가 결국 각국의 흥망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는 그의 가설의 증거로 미국, 영국, 독일, 일본의 예와 더불어 한국, 대만도 포함시키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결국 정부가 원칙을 지키고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다.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군대(兵), 민생(食), 신뢰(信)라고 하였다. 그 중 하나를 버린다면 무엇이냐고 물으니 兵을 버리라고 하였고,
또 하나 버리면 무엇이냐고 물으니 食을 버리라 하였다. 즉, 국가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공자는 신뢰(信)라고 보았다.
그로부터 2천년 뒤 오늘날 학계에서는 신뢰를 ‘사회적 자본’이라 부른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한국을 저신뢰사회로 본다(Fukuyama, 1996).
아마 우리가 저신뢰사회가 된 배경은 오랜 식민지와 독재일 것이다. 위정자들이 도적적 정당성이 없고,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니 자연히
국민들도 그런 태도가 몸에 배여 있다. 그러니 우리의 사회적 자본은 바닥 수준이다. 우리의 경제발전 수준에 비해 사회적 자본은 크게 부족하다.
참여정부, ‘신뢰’로 갈등 풀어 사회적 비용 줄이고 경제발전 노력
우리가 경제발전을 하려면 파괴된 우리의 사회적 자본을 복원하는 작업이 긴요하다. 그리하여 대화와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 합의된 결정에 사회 구성원들이 깨끗이 승복할 때 비로소 우리의 경쟁력도 한 단계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참여정부에서는 지속가능발전위원회가 사회적 배심원 역할을 맡아서 숱한 사회갈등을 해결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회갈등을 드러내고 정면으로 해결을 모색하는 것은 과거 정부에서 볼 수 없던 전혀 새로운 접근방법이었다. 비록 가시적 성과를 내지는 못했으나 한탄강 개발을 둘러싸고 지속가능발전위원회가 사회 배심원 모델을 시험했던 것은 다음 기회에 언젠가 재시도할만한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사회갈등이 낳는 사회적 비용은 엄청난 규모일 것이다. 이는 과거 개발독재 시절의 성장 위주 노선이 낳은 심각한 부작용이다.
우리가 높은 성장률만을 보고 무조건 좋아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독재정권이 눈앞의 성장에만 급급하여 사회자본이란 소중한 장기적 자산을 파괴해놓은 부작용은 크고도 오래 간다.
따라서 이런 성장은 사회적 산술로 본다면 결코 잘한 일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정성을 기울여 각종 사회갈등에 원칙과 신뢰로써 접근하여 국민 마음속 불신과 집단이기주의를 걷어낸다면 그 자체
살기 좋은 사회, 신뢰사회를 만들 뿐 아니라 각종 사회갈등에 수반하는 높은 사회적 비용을 줄여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결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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